짐 실은 기차가 드나들던 곳
어릴적이라면,아마도 저러한 군사시설에 대해 사진을 찍는 나를 간첩으로 혐의를 두어 끌려 갔을지도 모르겠다.
중학생이던 우리는 새길이 나기 전 논둑길을 지나 학교에 갔다.
종종 좁은 길을 막고 미군부대 안으로 향하는 커다란 철조망 문이 열리고 짐실은 기차가 그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수신호를 하던 부산함을 멀찌감히 구경하곤 했는데
철조망 안으로 훤히 뵈던 곳은 어린 우리 눈에 마냥 신기할 탱크며 이름을 알지 못할 낡은 차들이 수없이 많이 늘어서 있곤 했다.
용버들이 꾸불꾸불 물이 오르던 곳 여전한 것은 실버들이다.
지금은 높다란 시멘트 담장을 하여 안을 들여다 보기 어렵고,그로하여 마을은 어두워졌다.
미군부대 주변에 살아서 이미지가 안좋기도 했는데,일찍 출근하고 퇴근하는 그들의 차들이 줄지어 밀려 나오는 시간은 오후 네시 반이다.
칼퇴근이라 했던가.옛날 나의 친구들 아버지들은 자전거를 타고 출퇴근 하셨는데,그분들의 몸수색을 하던 헌병들이 무섭게 느껴졌다.
이제는 아흔을 바라보는 연세의 그시절의 어른은 꼬장꼬장한 성격이 이른대로 도시락을 펼쳐 보이며 좁다란 수색문을 통과했다고 전해진다.
엄마도 미군부대 안의 미국인들이 좋아하는 잔디를 늘 그모양대로 유지하기 위해 잔디와 잡초를 깎는 일을 용역주었는데,그 일을 오래 했기에 엄마도
몸수색을 당하며 후문을 통과하면서,혹여나 그들의 시선에 걸릴만한 허접한 것을 가져나오다 고초를 겪지나 않나 노심초사 했던 기억이 있다.
아버지가 미군부대에 근무하는 아이들에게 미제학용품은 도도한 자랑거리였고,마냥 부러움의 대상이 되었지만,실상 그것들은 군용으로 나온 물품이었을 것이다.
시골구석에 어울리지 않은 문화에 일찍 눈뜨는 계기를 준 미군부대는 이제 시시하기도 하고,오래 변경과 같은 미군부대 주변의 주민으로 살아와 수많은 변화를
두루 보아온 터였지만,이제 흥청이는 그들의 인적이 드물고,거리는 쇠락했다.
미군을 상대로 하던 주택 임대업도 시들해져 한해만 집을 세 주면 새로운 집을 한 채 더 살 수 있다던 호시절은 다하여 신문물을 제일 먼저 따르는 곳이 되어
한국인을 상대로 임대업을 하는이들도 이젠 따로이 세간을 준비하지 않고도 세를 들 수 있고,이사를 할 때도 옷가지를 넣은 가방 하나로 살던 곳을
옮겨 갈 수 있게 된 데에는 미군들의 풍습에 익숙한 임대업자들이 경쟁적으로 세간을 들이고,보다 더 나은 세간을 들여 세들어 살 미군을 구하는 시대가 와
점점 임대는 어려워 진다고들 한다.
그러한 풍경이 많은 변화를 겪으며 여전히 봄이면 실버들은 푸른 머리카락 같은 가지를 한껏 늘이고,바람을 타며 살랑이는 것이다.
육교가 놓인 덕분에 담장에 가려진 풍경을 본다.담장 안의 미국을.